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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브리아, 탄생 이후
    서사 2026. 1. 10. 22:17



      처음에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었고 앞과 뒤라는 개념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얇게 겹쳐져 있을 뿐이었다. 시간조차 이름을 얻지 못한 상태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리브리아는 깨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숨을 쉬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기가 폐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녀가 세계 안으로 스며든 느낌에 가까웠다.

      잉크의 냄새가 났다. 마른 종이의 결이 손끝에 닿았고,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손길의 온기가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들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 본능처럼 이해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검은 잉크처럼, 혹은 오래되어 바래버린 페이지처럼 희게.

      그 안쪽에서 작은 빛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이 되지 못하고, 소리로도 남지 못한 것들. 사라진 언어들이 별처럼 숨 쉬고 있었다.

      리브리아는 그것이 왜 슬픈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그 빛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뜨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보는 순간 무언가를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오른쪽 눈에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펼쳐진 책의 문양이 떠올랐다. 아직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았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이야기의 무게를 견딜 준비가 된 눈.

      왼쪽 눈에는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마치 무언가를 관측하기 위해 세상이 먼저 마련해 둔 장치처럼.

      그녀는 그 눈으로 처음으로 세계를 읽었다. 그 순간, 이름이 불렸다.


      리브리아.



      그것은 그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도서관의 책들, 영원히 꽂혀 있을 이야기들과 언젠가 사라질 이야기들, 그리고 소멸을 눈앞에 둔 이야기들이 그녀의 탄생을 바라며 지은 이름이었다.

      도서관의 천장에 닿지 못하고 떠돌던 사라진 이야기의 파편들이 그녀의 탄생을 감지하고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 그들은 책이 아닌 다른 형태를 얻었다.

      푸르게 빛나는 나비들이 갓 태어난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것은 다정한 울림이었다. 그들은 슬픔을 안고 흩어졌지만, 막 태어난 리브리아에게 슬픔을 처음으로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읽어주는 이를 만나 느끼는 기쁨, 자신들을 기억해 줄 존재에 대한 고마움, 자신을 끌어안아 줄 존재를 만난 행복. 팔랑이는 날개들이 그런 감정들을 곁에서 조용히 전했다.

      그들 덕분에 리브리아가 처음으로 지은 표정은 웃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탄생시킨 책을 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책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그 책은 이 도서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남아 있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나비들을 따라 그녀는 도서관을 걸었다. 책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고, 책장은 위로도 아래로도 한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높이를 따라 시선을 올리면 천장 대신 도서관을 덮고 있는 밤하늘이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안심이 되는 풍경이었다.



      리브리아는 나비가 멈춘 자리에서, 곧 사라질 듯한 책 한 권을 펼쳤다. 아직 이것이 누군가의 삶인지, 꿈인지, 혹은 창작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 이야기가 만들어질때 담긴 감정들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책을 급히 읽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 잠시 손을 얹고 있었다. 종이의 감촉, 잉크가 스며든 흔적, 수없이 접혔다 펴졌을 시간. 그 모든 것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리브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놀라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난 것처럼.

      그녀는 페이지를 넘기며 천천히 웃었다. 이야기 속 인물의 선택이 서툴러서, 고집스러워서, 때로는 어리석어서.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사랑스러웠다. 리브리아는 그 인물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읽고 싶어졌다. 이미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고 해도 그 과정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구원하거나, 교정하거나,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있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책을 덮었을 때 리브리아는 조금 아쉬웠다. 더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야기가 끝났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의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책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소멸을 막아야겠다는 결심도 아직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리브리아는 책을 찾아다녔다. 사라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부서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어제 읽었던 책을 다시 찾으러 왔다. 끝이 어땠는지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인물의 말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책장이 무너지지도, 먼지가 쌓이지도 않았다. 누군가 급히 빼낸 흔적도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어 있었다.

      리브리아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것이 이동이 아니라 소멸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어긋남이 느껴졌다. 어제까지 분명히 존재하던 무언가가 오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리브리아는 빈 공간에 손을 뻗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감촉. 이미 식어버린 온기의 잔상. 그녀는 자신이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카락 안쪽에서 언어들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말을 걸지도, 경고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가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조용히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리브리아는 처음으로 책장을 다시 세었다. 의무도, 책임도 아니었다. 다시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리브리아는 책을 덮을 때 조금 더 천천히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오래 느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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